『운전석의 여자』 이연지 번역가 인터뷰
《운전석의 여자》 읽기
목차
1. 『운전석의 여자』가 가진 매력
2. 「운전석의 여자」의 서술방식과 스파크가 주인공 '리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
3. 역자가 영업하는 『운전석의 여자』 속 단편들!
1. 『운전석의 여자』가 가진 매력
들불 역자 선생님께서 직접 출판사 측에 『운전석의 여자』 출간 제안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이 책의 출간 제안을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연지 번역가 코로나 기간 일상이 중단되면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꽤 긴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뭘 해도 집중하기 힘들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 머리도 식히고 안정도 찾을 겸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운전석의 여자』 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해서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은 독자분에게 뮤리얼 스파크의 매력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이 생겼는데,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무작정 책상 앞에 앉아 첫 장을 번역한 다음 출간 제안을 드렸는데요. 무엇보다 저는 번역이 처음이었고, 또 뮤리얼 스파크가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가, 작품 역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해서 큰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문예 출판사 측에서 관심을 보여주시고, 믿고 번역을 맡겨 주신 덕에 이렇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더 많은 독자분께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들불 뮤리얼 스파크는 여러 책을 출간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은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명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워요. 선생님께서는 뮤리얼 스파크의 어떤 점을 애정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이연지 번역가 처음 『운전석의 여자』를 발견(?)하고 이 책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다른 책을 검색하던 중에 추천 도서로 떴었거든요. 당시 저는 뮤리얼 스파크라는 작가를 몰랐는데, 아마 제목에 흥미를 느끼고 클릭했던 것 같아요. 책에 대한 설명을 읽지 않고 바로 미리보기로 첫 페이지를 쓱 훑어보았더니, 원피스를 벗기라며 옷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와 당혹스러워하는 점원이 등장하더라고요. 막연하게 봉변을 겪는 이 점원이 주인공인 이야기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장 뒤로 넘겼는데, 화자의 시선은 제 예상과는 달리 점원이 아닌 옷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든, 심상치 않아 보이는 여자를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측을 180도 벗어난 진행에 놀란 동시에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단번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바로 책을 주문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손에서 정말 내려놓지 못하고 읽었어요. 사실 저는 실험적인 소설을 크게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그런데도 이 책이 가진 흡입력에는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래 체험한 중에 가장 강렬한 독서 경험을 선사해 준 작가인지라 그 뒤로는 어디를 가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소개했어요. 그리고 뮤리얼 스파크를 더 좋아하게 된 건 단편집을 읽으면서였는데요, 서늘하고 냉소적인 줄만 알았는데 인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드러낸다거나, 대체로 건조한 서술 중간중간에 거의 플로베르적이라 할만한 공들인 묘사가 나오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상반된 면모가 공존한다는 점도 제가 뮤리얼 스파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리제의 난해한 옷차림도 그렇지만, 「이교의 유대 여인」 속 할머니의 발목 주변에서 페티코트가 하얗게 빛나는 광경이나, 「오르몰루 시계」 속 루블로니치 부인의 침실에 대한 탐미적인 묘사처럼요.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 「운전석의 여자」의 서술방식과 스파크가 주인공 '리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
들불 이 책의 표제작인 「운전석의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스파크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집필한 최고의 소설이자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리제’는 신경질적이고, 광적인 여성입니다. 읽다보면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싶은 순간들이 여럿 등장해요. 그의 선택에 어떠한 의도가 있는 건지 전혀 드러나지도 않고요. 이러한 설정에는 독특한 서술방식도 한 몫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미래에 리제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중간중간 언급하고, 다시 현재(혹은 과거)로 돌아와 리제의 행동을 멀리서 관찰하듯 서술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리제의 속내를 알 수 없죠.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한편, 그의 마음을 추측하기 위해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서술방식이 어떠한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연지 번역가 일단 초반에 리제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언급함으로써 이 소설은 독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 궁금증을 동력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요, 그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후더닛(Whodunit) 장르의 문법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씀처럼 리제의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제삼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질문에 적어주신 그대로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 말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운전석의 여자』는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나게 되고요. 작품 해설에도 썼지만 이 작품은 19세기의 전통적 소설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사조인 '누보 로망'적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창자인 로브그리예와 비교해 보면 뮤리얼 스파크는 그에게서 일부 방법론을 차용했을 뿐 그의 문학론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작품을 쓰려는 의지는 없었다는 게 명확해집니다. 이런 면을 종합해 봤을 때 뮤리얼 스파크는 실험적 소설과 대중적 소설 모두의 이론과 작법에 통달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특성을 그대로 적용하고 어떤 특성을 비틀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실천에 옮겼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전형성을 벗어난 서술 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결과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작품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운전석의 여자를 펼치는 건 리제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올라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리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요. 시간이 가도 리제는 결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고, 차를 세울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독자는 그 곁에 앉아 꼼짝없이 리제의 질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리제가 폭주를 멈추기 전(혹은 폭주를 멈춰줄 사람을 찾아내기 전)까지는요.
들불 한편, 광기에 사로잡힌 여성을 이 사회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또 그러한 여성을 위협하는 위험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해설에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를 언급하시면서, 정신적 문제가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나 학대와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있었던 점을 짚어주신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스파크가 ’리제‘라는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연지 번역가 말씀처럼 정신적 문제가 확연한 리제를 한편에서는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로 여겨 두려워하고, 한편에서는 손쉬운 범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소설 속에서 리제는 두 차례나 강간의 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데, 이 두 강간 미수범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결국 리제가 사체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리제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경찰의 수사가 두 남자 뿐 아니라 리제의 진짜 살인범에게까지 도달하고, 또 리제의 신원까지 밝힐 수 있었던 건 모두 리제가 남긴 ‘자취’ 때문이죠. 리제의 옷차림, 관계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밝은 표지의 책, 그리고 각종 기행 모두가요. 그리고 이 전부는 리제가 선택한 최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극단적인 수단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수단을 택해야 했던 이유가 수많은 신원 미상의 살인 피해자 중 하나, 혹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자취를 감춘 피해자 중 하나로 남겨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처절하게 느껴지죠. 자신 같은 존재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악의, 또 공권력의 무심함과 무능함, 이 모든 것을 살면서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으리란 것도 짐작해 볼 수 있고요. 그런 점에서 ‘리제’라는 여성은 작게는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여성, 크게는 사회적 약자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가시성을 확보할 수 없는 사회상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 쓰인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층 더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3. 역자가 영업하는 『운전석의 여자』 속 단편들!
들불『운전석의 여자』 에는 표제작 외에도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요. 이 중 역자 선생님께서 특히 애정하시는 작품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 주세요.
이연지 번역가 사실 문예 출판사 측에서 『운전석의 여자』 에 실을 10편의 단편을 선정할 때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신 터라, 10편의 단편 모두 어느 정도 제 사심이 들어간 선택의 결과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전부 좋아하는 작품, 아픈 손가락이긴 한데요... 굳이 한 작품을 꼽자면 「이교의 유대 여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번역하는 동안 줄곧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을 했거든요. 제 외할머니는 소설 속 화자의 할머니와 닮은 점은 없으세요. 불교 신자셨고, 곱게 단장하는 걸 좋아하셨고, 여성 행진에 참여하신 적은 더더욱 없고요. 그런데 뮤리얼 스파크의 자전적인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리는 애정 어린 어조 때문인지, 아무튼 번역하며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몇 차례 울기도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이 작품에 애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아름다웠으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를 “맹렬히 뒤쫓아 손아귀에 넣어 결혼”했으며,“자신이 일해서 평생 그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당차고 장사 수완 좋은 할머니라니. 뮤리얼 스파크가 이 독특한 조합의 노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더 길게 써주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들불 끝으로 『운전석의 여자』를 통해 뮤리얼 스파크의 작품을 처음 읽게 될 독자들에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연지 번역가 운전석의 여자를 재미있게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끝까지 난해함만을 느낀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런 독자분들께 뮤리얼 스파크가 반전을 숨긴 작가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운전석의 여자만 읽고 책을 덮지 마시고 단편에도 꼭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핑커튼 양의 대재앙」으로 넘어가 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길이는 짧지만 뮤리얼 스파크식 통찰력과 냉소, 유머가 훌륭하게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신경증과 이에 대한 편견 혹은 낙인은 뮤리얼 스파크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거듭 다뤘던 주제인데, 『운전석의 여자』와 이러한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이를 훨씬 더 가볍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운전석의 여자』의 추리소설적인 면이 마음에 드셨던 독자분께는 「포토벨로 로드」를 추천합니다. 주인공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초반에 밝히며 진행되는 점이 유사하지만 『운전석의 여자』보다는 덜 실험적이에요. 스파크가 꽤 긴 세월 머물렀던 아프리카가 배경으로 등장해,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적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운전석의 여자』를 통해 뮤리얼 스파크의 매력을 발견하는 독자분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고, 그래서 국내에 뮤리얼 스파크의 더 많은 작품이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 또 다른 각도에서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석의 여자』 이연지 번역가 인터뷰
《운전석의 여자》 읽기
목차
1. 『운전석의 여자』가 가진 매력
2. 「운전석의 여자」의 서술방식과 스파크가 주인공 '리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
3. 역자가 영업하는 『운전석의 여자』 속 단편들!
1. 『운전석의 여자』가 가진 매력
들불 역자 선생님께서 직접 출판사 측에 『운전석의 여자』 출간 제안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이 책의 출간 제안을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연지 번역가 코로나 기간 일상이 중단되면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꽤 긴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뭘 해도 집중하기 힘들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 머리도 식히고 안정도 찾을 겸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운전석의 여자』 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해서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은 독자분에게 뮤리얼 스파크의 매력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이 생겼는데,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무작정 책상 앞에 앉아 첫 장을 번역한 다음 출간 제안을 드렸는데요. 무엇보다 저는 번역이 처음이었고, 또 뮤리얼 스파크가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가, 작품 역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해서 큰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문예 출판사 측에서 관심을 보여주시고, 믿고 번역을 맡겨 주신 덕에 이렇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더 많은 독자분께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들불 뮤리얼 스파크는 여러 책을 출간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은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명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워요. 선생님께서는 뮤리얼 스파크의 어떤 점을 애정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이연지 번역가 처음 『운전석의 여자』를 발견(?)하고 이 책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다른 책을 검색하던 중에 추천 도서로 떴었거든요. 당시 저는 뮤리얼 스파크라는 작가를 몰랐는데, 아마 제목에 흥미를 느끼고 클릭했던 것 같아요. 책에 대한 설명을 읽지 않고 바로 미리보기로 첫 페이지를 쓱 훑어보았더니, 원피스를 벗기라며 옷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와 당혹스러워하는 점원이 등장하더라고요. 막연하게 봉변을 겪는 이 점원이 주인공인 이야기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장 뒤로 넘겼는데, 화자의 시선은 제 예상과는 달리 점원이 아닌 옷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든, 심상치 않아 보이는 여자를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측을 180도 벗어난 진행에 놀란 동시에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단번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바로 책을 주문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손에서 정말 내려놓지 못하고 읽었어요. 사실 저는 실험적인 소설을 크게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그런데도 이 책이 가진 흡입력에는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래 체험한 중에 가장 강렬한 독서 경험을 선사해 준 작가인지라 그 뒤로는 어디를 가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소개했어요. 그리고 뮤리얼 스파크를 더 좋아하게 된 건 단편집을 읽으면서였는데요, 서늘하고 냉소적인 줄만 알았는데 인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드러낸다거나, 대체로 건조한 서술 중간중간에 거의 플로베르적이라 할만한 공들인 묘사가 나오는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상반된 면모가 공존한다는 점도 제가 뮤리얼 스파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리제의 난해한 옷차림도 그렇지만, 「이교의 유대 여인」 속 할머니의 발목 주변에서 페티코트가 하얗게 빛나는 광경이나, 「오르몰루 시계」 속 루블로니치 부인의 침실에 대한 탐미적인 묘사처럼요.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 「운전석의 여자」의 서술방식과 스파크가 주인공 '리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
들불 이 책의 표제작인 「운전석의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스파크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집필한 최고의 소설이자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리제’는 신경질적이고, 광적인 여성입니다. 읽다보면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싶은 순간들이 여럿 등장해요. 그의 선택에 어떠한 의도가 있는 건지 전혀 드러나지도 않고요. 이러한 설정에는 독특한 서술방식도 한 몫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미래에 리제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중간중간 언급하고, 다시 현재(혹은 과거)로 돌아와 리제의 행동을 멀리서 관찰하듯 서술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리제의 속내를 알 수 없죠.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한편, 그의 마음을 추측하기 위해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서술방식이 어떠한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연지 번역가 일단 초반에 리제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언급함으로써 이 소설은 독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 궁금증을 동력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요, 그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후더닛(Whodunit) 장르의 문법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씀처럼 리제의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제삼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질문에 적어주신 그대로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 말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운전석의 여자』는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나게 되고요. 작품 해설에도 썼지만 이 작품은 19세기의 전통적 소설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사조인 '누보 로망'적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창자인 로브그리예와 비교해 보면 뮤리얼 스파크는 그에게서 일부 방법론을 차용했을 뿐 그의 문학론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작품을 쓰려는 의지는 없었다는 게 명확해집니다. 이런 면을 종합해 봤을 때 뮤리얼 스파크는 실험적 소설과 대중적 소설 모두의 이론과 작법에 통달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특성을 그대로 적용하고 어떤 특성을 비틀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실천에 옮겼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전형성을 벗어난 서술 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결과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작품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운전석의 여자를 펼치는 건 리제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올라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리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요. 시간이 가도 리제는 결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고, 차를 세울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독자는 그 곁에 앉아 꼼짝없이 리제의 질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리제가 폭주를 멈추기 전(혹은 폭주를 멈춰줄 사람을 찾아내기 전)까지는요.
들불 한편, 광기에 사로잡힌 여성을 이 사회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또 그러한 여성을 위협하는 위험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해설에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를 언급하시면서, 정신적 문제가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나 학대와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있었던 점을 짚어주신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스파크가 ’리제‘라는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회의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연지 번역가 말씀처럼 정신적 문제가 확연한 리제를 한편에서는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로 여겨 두려워하고, 한편에서는 손쉬운 범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소설 속에서 리제는 두 차례나 강간의 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데, 이 두 강간 미수범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결국 리제가 사체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리제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경찰의 수사가 두 남자 뿐 아니라 리제의 진짜 살인범에게까지 도달하고, 또 리제의 신원까지 밝힐 수 있었던 건 모두 리제가 남긴 ‘자취’ 때문이죠. 리제의 옷차림, 관계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밝은 표지의 책, 그리고 각종 기행 모두가요. 그리고 이 전부는 리제가 선택한 최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극단적인 수단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수단을 택해야 했던 이유가 수많은 신원 미상의 살인 피해자 중 하나, 혹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자취를 감춘 피해자 중 하나로 남겨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처절하게 느껴지죠. 자신 같은 존재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악의, 또 공권력의 무심함과 무능함, 이 모든 것을 살면서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으리란 것도 짐작해 볼 수 있고요. 그런 점에서 ‘리제’라는 여성은 작게는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여성, 크게는 사회적 약자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가시성을 확보할 수 없는 사회상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 쓰인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층 더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3. 역자가 영업하는 『운전석의 여자』 속 단편들!
들불『운전석의 여자』 에는 표제작 외에도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요. 이 중 역자 선생님께서 특히 애정하시는 작품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 주세요.
이연지 번역가 사실 문예 출판사 측에서 『운전석의 여자』 에 실을 10편의 단편을 선정할 때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신 터라, 10편의 단편 모두 어느 정도 제 사심이 들어간 선택의 결과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전부 좋아하는 작품, 아픈 손가락이긴 한데요... 굳이 한 작품을 꼽자면 「이교의 유대 여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번역하는 동안 줄곧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을 했거든요. 제 외할머니는 소설 속 화자의 할머니와 닮은 점은 없으세요. 불교 신자셨고, 곱게 단장하는 걸 좋아하셨고, 여성 행진에 참여하신 적은 더더욱 없고요. 그런데 뮤리얼 스파크의 자전적인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리는 애정 어린 어조 때문인지, 아무튼 번역하며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몇 차례 울기도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이 작품에 애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아름다웠으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를 “맹렬히 뒤쫓아 손아귀에 넣어 결혼”했으며,“자신이 일해서 평생 그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당차고 장사 수완 좋은 할머니라니. 뮤리얼 스파크가 이 독특한 조합의 노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더 길게 써주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들불 끝으로 『운전석의 여자』를 통해 뮤리얼 스파크의 작품을 처음 읽게 될 독자들에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연지 번역가 운전석의 여자를 재미있게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끝까지 난해함만을 느낀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런 독자분들께 뮤리얼 스파크가 반전을 숨긴 작가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운전석의 여자만 읽고 책을 덮지 마시고 단편에도 꼭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핑커튼 양의 대재앙」으로 넘어가 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길이는 짧지만 뮤리얼 스파크식 통찰력과 냉소, 유머가 훌륭하게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신경증과 이에 대한 편견 혹은 낙인은 뮤리얼 스파크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거듭 다뤘던 주제인데, 『운전석의 여자』와 이러한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이를 훨씬 더 가볍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운전석의 여자』의 추리소설적인 면이 마음에 드셨던 독자분께는 「포토벨로 로드」를 추천합니다. 주인공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초반에 밝히며 진행되는 점이 유사하지만 『운전석의 여자』보다는 덜 실험적이에요. 스파크가 꽤 긴 세월 머물렀던 아프리카가 배경으로 등장해,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적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운전석의 여자』를 통해 뮤리얼 스파크의 매력을 발견하는 독자분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고, 그래서 국내에 뮤리얼 스파크의 더 많은 작품이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 또 다른 각도에서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