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및 역자 인터뷰]『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역자 황희선 선생님 인터뷰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황희선 선생님 인터뷰
(제공 : arte (아르테))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구매처


세계적인 페미니즘 이론가, 생물학자, 문화비평가, 과학사학자, SF 덕후… 해러웨이만큼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이보그’, ‘상황적 지식’ 등 다양한 학문의 장벽을 뛰어넘어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는 그의 전복적인 주장은 철학, 문학, 생물학, 동물사회학은 물론 인류학, 포스트휴머니즘 등 수많은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그런 해러웨이의 사상을 집성한 대표작이 바로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인데요,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이 책이 무려(!) 21년 만에 새 번역으로 찾아왔습니다. 전복적이고 독보적인 사유뿐 아니라 난해한 문체로도 명성이 높은 도나 해러웨이. 만만치 않은 이 작품을 번역하신 황희선 선생님을 만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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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에 복간된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표지에는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 과학기술학자 임소연 선생님, 인류학자 이상희 선생님뿐 아니라 SF 작가 김초엽 작가님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 계시는 많은 분이 해러웨이를 읽고 추천해 주시고 계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경로로 해러웨이를 접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그의 어떤 면에 끌려 번역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처음 해러웨이를 접한 건 2004년에서 2005년 무렵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진화생물학을 전공하는 생물학과 석사과정 학생이었고, (분열 이전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학부 시절의 친구 하나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마침 해러웨이를 읽는 세미나를 함께하자고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동문선 번역본을 비롯해 해러웨이의 다른 저작 원서들을 여이연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세미나에는 보통 5-6명 정도가 참여했고, 여기에 책을 함께 번역한 임옥희 선생님도 계셨었습니다. 

   당시에는 진화생물학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제법 활발했는데, 제가 공부하던 신다윈주의 이론은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종종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런 주장의 내용을 뜯어보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해러웨이의 글들은 생물학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쓴 것으로 읽혔습니다. 여기서부터 해러웨이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해러웨이를 계속 읽어 나가게 된 것은 수유+너머, 더 일반적으로는 당시의 지적 생태계에서의 저의 위치와 관련됩니다.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곳에서 저는 매우 드문 ‘이과’ 사람이었고, 생물학을 포함해 ‘자연과학’과 관련된 세미나 참석, 강의 등을 적극적으로 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을 말하면, 제가 해러웨이에 대해 아주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공부를 계속해 나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상황 속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접경지에서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하다고 생각했던 사상가가 해러웨이였기 때문에 주로 해러웨이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야기들을 구성했고, 그러다 보니 해러웨이의 글들을 계속 참조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은 수유+너머 및 다지원과 같은 곳에서 했던 강의들이 온라인에 업로드된 것을 보고 출판사들에서 먼저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 2019)의 경우는 제가 해러웨이를 번역한다면 딱 하고 싶었던 두 글의 묶음이었기 때문에 아무 고민 없이 기쁘게 일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는 번역을 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의 마무리도 매우 늦어졌습니다. (저자, 편집부, 독자분들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때는 이미 한 번 ‘데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하고 싶다는 느낌 자체보다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배운 데 대한 보답으로 일을 맡아야겠다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저자에게 보답이 될 만한 결과물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와 같은 지적 채무관계를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러웨이에게 배운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비판의 방법을 배운 것이고, 둘째는 이질적인 것들의 ‘사이’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고, 세 번째는 페미니즘 감수성을 익힌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물론 다른 저자들을 통해서도 (조금 다르게) 배울 수 있지만, 해러웨이식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배움이 그의 글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러웨이의 글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웃음) 전공자들조차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두르는 것으로 유명한데, 번역도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책을 번역하시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신 사항이나 고민하신 지점, 생각나는 에피소드 등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번역자로서 저는 가능한 한 가독성이 좋은 방향으로 번역을 해 나가려 합니다. 문맥에 따라서는 번안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문의 구조를 제법 많이 재구성하는 편입니다. 이번 번역에도 늘 그렇듯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그런 방향을 선호한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도 이 책에서 「사이보그 선언문」을 제하면 제가 번역한 장들(영장류학사 관련 장들)은 문체가 평이해서 크게 어려웠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이보그 선언문」은 책세상 판본에서 출간 후 눈에 띈 오류들을 바로잡고 글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으려 일부 수정했습니다.


3.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는 해러웨이가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발표한 글 10편을 묶은 책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글이자 해러웨이에게 명성을 안겨 준 글이 바로 7장 「사이보그 선언문」일 텐데요, 해러웨이가 주장하는 ‘사이보그’란 무엇이며, 그가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라고 선언한 데에는 어떤 맥락이 있을까요?


   질문 주신 것처럼 「사이보그 선언문」이 놓인 맥락을 짚어 보면 사이보그 개념뿐 아니라 글의 의미를 좀 더 명료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이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이지 신들린 듯 쓰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느낌이 강해지고(저자 자신은 맨정신으로 썼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든 그와 같은 직관의 밀도를 담아내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점에서는 독자분들도 공감하실 걸로 짐작합니다. 

   먼저, 해러웨이가 말하는 사이보그는 페미니스트 주체성을 형상화하는 하나의 이미지라는 점을 짚고 싶습니다. 글은 《사회주의 리뷰》라는 잡지의 청탁을 받아 작성되었고, 주요 내용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정세분석을 진행하여 기술과학(‘테크노사이언스’)의 전망에 대해 논의하는 것입니다. 물론이지만, 기술과학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군사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과 같은 여러 지배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그와 같은 관계를 구성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기술과학을 어떻게 좀 더 해방적인 목표를 위해 재전유할 수 있을까요? 해러웨이는 당시 ‘진보 진영’에서 기술과학을 (여성적/비서구적인 것/원료로서) 자연에 대한 (남성적/서구적인 것/생산자로서) 문화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보고 거부하는 제스처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하면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기술과학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즉,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라는 선언에서 ‘여신’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비판에 의해 ‘신’도 유효성을 상실했겠지만, ‘여신’의 이미지가 상징하는 순수하고 기술배제적인 유토피아 또한 현실적이지 않으며, 계급, 인종, 젠더 정치로 진흙탕이 된 기술과학에 뛰어드는 것이 페미니스트 정치 투쟁의 주요 요소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이보그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이보그가 될 것인가가 관건인 셈입니다.

   당시의 기술과학을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접근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는 현실뿐 아니라 대중문화적 상상력 속에서 사이보그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던 시기입니다. 여기에는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페미니스트 SF뿐 아니라, 〈600만불의 사나이〉, 〈터미네이터〉와 같은 콘텐츠들도 포함됩니다. 이들 작품에서 사이보그는 상상 속의 존재이지만 기술과학 발전의 한 방향을 함축하며 그 모멘텀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가상과 실재의 혼합물이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기술과학 자체가 현실을 소설보다도 더 소설처럼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이 둘 사이의 구분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볼 여지가 생깁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유기체와 기계의 혼종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당시 상호 침투되기 시작한 각종 경계들(물질과 비물질적인 것, 가사경제와 정치경제 등등)을 조사한 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종의 ‘대세’이며 여기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페미니스트 SF의 이미지를 활용해 모색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해러웨이는 간혹 이야기되는 것처럼, 단순히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라거나 “전복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과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에 대해 논의할 것이며, 지배 없는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경계의 뒤섞임과 구성이라는 테마는 2003년의 글인 「반려종 선언」에서 좀 더 명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동물권의 개념을 인권의 적용 범위를 확장하는 문제로 보면서 종의 진화사적, 사회문화사적 차이(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실질적 필요)를 흐릿하게 만든다거나, 인간과 개의 관계를 문자 그대로 대칭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다가 무책임한(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개는 개이기 때문에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그 때문에 아질리티 게임에서와 같이 경계가 뒤섞이는 기쁨의 체험 역시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즉, 개‘와’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지배에 의한 권력관계로서만이 아니라 상호구성적인 생산력으로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해러웨이의 글이 당대의 다양한 페미니즘 담론과의 대화 속에서 쓰였다는 사실도 너무 당연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탈식민주의와 반인종주의의 논의들, 정신분석 내부의 페미니스트적 비판 담론, 래디컬 페미니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코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과 실천 가닥들에 대한 당시 해러웨이의 논평을 글 전반에 걸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의들이 기술과학에 대해 어떤 새로운 분석을 가능케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흔히 과학은 객관적이고 어떠한 편견도 없으며 사회적 맥락이나 관계에서 분리되어 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5장 「영장류의 본성을 둘러싼 경합」에 등장하는 워시번 부계의 ‘남성 수렵자 가설’에서 알 수 있듯, 해러웨이는 과학적 지식 또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에서 직조되는 상황적 지식임을 역설합니다. 그의 ‘상황적 지식’ 개념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상황적 지식, 또는 상황 속의 지식은 페미니스트에게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이란 무엇을 뜻하고 또 뜻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철학자 샌드라 하딩(및 다른 학자들)의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 개념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한 객관성은 객관적 진리는 없다는 상대주의(특히 모든 것을 ‘사회화’하는 강한 사회구성주의 프로그램 등) 및 근대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객관성의 개념 모두를 비판합니다. 보다 객관적인, 더 나은 앎이란 가능하지만 그런 지식은 지식의 외부 요소라고 간주된 것들, 이를테면 연구자의 젠더를 숨겨 편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하고, 지식 생산의 구성 요소로서 적극 고려할 때 모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딩은 명시적으로 계몽주의의 요소들을 계승하고자 하며, 페미니즘 과학은 어떤 사실이 연구되거나 밝혀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 연구와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측면들을 드러내는 방식 등에서 계몽주의적 이상을 보다 잘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을 페미니스트 입장론(feminist standpoint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해러웨이 역시 보다 객관적인, 더 나은 앎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페미니스트들이 이와 같은 지식 생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 나은 앎은 전지적 시점 대신 국지적 시점을 택하고, 지식 생산에 개입하는 장치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선하며, ‘객관(objectivity)’이 말하는바, 대상/사물(object) 자체의 행위력(agency)을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추구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의 주체의 위치를 ‘부분’으로만 규정했고, 지식 생산의 전 과정을 가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을 특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러웨이의 생각에 따르면 당시 각광받던 다양한 종류의 입장론들은 특히 종속적 위치에 있는 앎의 주체를 특권화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관점 간 통약불가능성을 전제하며 ‘소외된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해러웨이는 종속된 주체의 인식론적 위상을 특권화하는 데는 여러 난점이 따른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낮은” 위치에서 앎을 구축해 가는 과정 자체가 지식 구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며, 이처럼 지식이 구축되는 과정 자체가 무매개적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앎의 위치를 특권화하고 당위로 삼게 되면 (‘소거를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로서는)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삭제하고, 특정 위치를 낭만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고 말합니다. 즉, 과학적 앎을 모색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통해 위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사물성, 즉 “부분적 연결”을 통해 위치를 정하는 것과 더 관계가 깊습니다. 이를테면, 좌판을 잘 깔아야 합니다.

   상황 속의 지식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해러웨이는 시각(vision)을 예로 듭니다. 가령, 인간과는 사뭇 달리, 비교적 거친 시각 체계를 가진 대신, 후각이 매우 발달한 개에게 세상은 어떻게 감각될까요? 더 보편적인 보기 방식이 있다기보다는, 각각의 보는/감각하는 방법이 앎의 주체의 삶의 방식을 체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해러웨이의 글을 보면 당시에는 서구 근대의 시각 중심적 문화가 지닌 성차별적 측면과 제국주의적 측면 등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고, 시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각은 예를 들면 촉각과는 달리 감각하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게끔 하고, 보는 자의 위치를 ‘숨길’ 수 있게끔 합니다. 파놉티콘 레짐이나 지도, 관음증적 시선 등을 사례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가령 세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한다고 여겨지고 전체를 응시(gaze)할 수 있게끔 하는 지도는 구체를 평면에 투사함으로써 공간을 왜곡하지만 어떤 부분을 어떤 기준으로 왜곡시킬 것인가에는 일련의 의도와 선택이 개입한다는 점이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의 식민지였던 지역들이 현재와 같은 국경의 모습(그리고 그러한 분절의 도입으로 인해 촉발되는 종족분쟁 등의 온갖 문제들)을 지니도록 한 매개물로서의 역할도 했던, 시각화된 지식의 한 유형입니다. 

   하지만 시각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구축될 수도 있고, 실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할 수 있습니다. 시각적 지식은 현미경적 세계로부터 우주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데, 시각의 확장을 위해서는 시각을 보조하는 다양한 보철물(현미경, 우주망원경 등), 그 보철물을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사회관계, 관측과 재구성 상황에서 가동되는 암묵적 지식, 곧 이들이 이루는 시각화 장치(apparatus)의 구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매개물들에 주목하고 일련의 기술적 실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활동의 결과로 얻어진 영상들은 세상 그대로를 재현하는 보편적인 상이 아니라, 여러 장치와 이론, 가치가 생산 과정에 관여해서 만들어진 합작품임을 보다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 주체로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은 일단 어디서 볼 것인가, 즉 앎의 주체의 위치(location)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를테면 아무 위치에도 있지 않으면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지식이 실제로 구축되는 과정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상대주의는 “모든 곳에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곳에도 있지 않은” 입장이고, 보편주의는 보편으로 가정된 위치 자체가 전체 그림을 왜곡시키는 하나의 위치로서 단지 무표화된(unmarked)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분적 시각(partial vision)은 해러웨이의 말을 빌리면 “상황 속의 지식이 가능하게 만드는 연결과 예상 밖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며,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정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이와 같이 생산의 전 과정이 시야에 들어올 때 보다 책임감 있는(accountable) 지식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이라는 개념이 말하는 내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이 밖에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실린 글 중 특별히 소개해 주고 싶은 글이 있으실까요? 


   책에 수록된 글들 모두가 흥미롭지만, 제가 해러웨이에 호감을 가진 계기가 된 글 중 하나인, 책의 3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장의 제목은 「생물학적 기업」입니다. 

   이 글은 20세기 전반 영장류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사회를 합리화하려 시도했던 거물 연구자인 로버트 여키스의 과학과, 20세기 후반 사회생물학이라는 연구 분야를 체계화하며 생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지식의 대통합(“통섭”)을 주장한 에드워드 윌슨의 과학을 비교하면서, 생물학 담론이 20세기에 걸쳐 유기체 공학에서 체계 공학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생애 후반에 자신의 초기 견해에서 한 발짝 물러서고 “자연주의자/박물학자(naturalist)”로서의 입지를 더 강화하면서 생물다양성의 문제에 천착했다는 점을 참고 삼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변화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변화와도 조응하는 측면들이 있습니다. 즉, 여키스의 학문에서 ‘자연’의 모습이 테일러주의적인 인간공학을 통해 재현된 것처럼 읽힌다면, 윌슨의 학문에서 자연은 최적화를 목표로 하는 체계 관리 공학의 용어들을 통해 재현되는 것처럼 읽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는 문제는 인식론적 지반의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규명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텐데, 이는 역사학의 오랜 문제이고 답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글의 끝에서 해러웨이는 분석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자본주의적 관계와 지배관계를 재생산하려는 목적으로 그 관계를 전유하는 방식에 따라 자연경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매우 심층적 차원에서 진행된다.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수준이 아니라, 근본 이론과 실천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여기에 덧붙여서 지배(domination), 곧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와 통제를 최소화한 생물학 이론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 본인이 구체적으로 제안할 수는 없지만, 그와 같은 과학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통섭’ 개념이 제안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생각을 진행해 보자면, 자연을 범주화하고 그 작동 방식을 개념화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는 생물학의 가장 기초적인 설명 단위를 구성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사회생물학과 같은 이론을 만들어 낼 때 암묵적으로 참조하는 평범한(banal) 사회 이론을 하나의 사회 이론으로서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지, 그리고 보다 긴 시간 층위에서는 이런 관점이 어떤 지적 흐름을 반영하는지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예컨대 경제(인류)학에서 20세기 중반을 풍미했던 이른바 형식론과 실재론 사이의 논쟁, 곧 보편적인 경제적 인간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추상과 구체라는 서구 변증법의 한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자연경제와 정치경제가 절합되는 지점을 잘 드러내 주는 영장류학 및 사회생물학에서는 이와 같은 테마들이 어떤 식으로 변주되고 있을까요?


6. 해러웨이는 SF 덕후로도 유명합니다. “SF와 사회 현실을 나누는 경계는 눈속임이다”라고 썼으며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도 옥타비아 버틀러나 오드리 로드 등 많은 여성 작가들의 SF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소개한 작품 중 들불 회원님들께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SF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웃음) 특별히 추천할 만큼 좋아하는 책이 있다거나, 뭔가를 추천할 적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시리즈물을 보면 SF 작품부터 먼저 찾아보는 취향입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페미니스트 SF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러웨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 뭐라고 논평을 할까 생각하곤 합니다. 


7. 마지막 질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들이 다시 해러웨이를 읽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혹은, 그가 예언한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러웨이를 읽어야 할까요?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 1980년대에 상상하던 대로의 디스토피아는 아마도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기술(과학)의 발전은 종종 설계자의 상상을 벗어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을 달로 보내는 데 쓰인 것보다 훨씬 계산 성능이 좋은 기계(스마트폰)를 각자 손에 쥐게 된 사람들이 고양이 밈을 만들고 구경하고 퍼트리는 데 이 기계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에서 감지되는 미시정치를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구에 전면적 핵전쟁을 야기할 수 있을(?) 치명적 코드를 써 내려가는 데 시간을 쓰는 사람에 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고, AI도 과연 그런 일에 ‘자기’ 시간을 쓰려 할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런’ 디스토피아는 오지 않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상 가능했던 기술과학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및 대멸종에 대한 대응 방안,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처리 문제, AI 기술의 규제 문제 등등. 이와 같은 문제에 접근할 때 이를테면 자연과 문화(‘인공’)라는 이분법적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는지, 혹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유효한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책의 부제가 “자연의 재발명”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아직 이런 은유가 가능하다면) 심층에서 사유할 때, 우리 시대에 ‘자연’이라는 개념과 실제는 어떤 상상과 실천의 원천으로 떠오르게 될까요?

   또, 책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몇 가지의 태도, 요즘 말로 ‘애티튜드’ 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축복도 저주도 아닌 방식으로” 바라보기, 기쁨과 분노 둘 중 어느 것에 매몰되지 않기,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직면해서 유토피아적 전망을 잃지 않기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