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소개][머니맨숀] 어리고 가난한 나에게

구구와 무수의 이야기는

각자 15분 간의 글쓰기 시간을 갖고 쓴 글입니다.

함께 진행하게 될 〈머니맨숀〉에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쓸 거예요. 



구구의 이야기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이었던 나는 반장이라는 이유로 소위 ‘노는 아이들’ 무리 근처에 자리를 배정 받았다. 담임은 내가 그 아이들을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나는 주로 휘둘리는 쪽이었으니까. 내 짝꿍은 다른 아이들을 악질적으로 괴롭히기로 유명한 애였다. 내게 언제나 모욕적인 장난을 쳤고, 다른 애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잘 사는 애가 ‘노는’ 애가 되면 학교폭력은 해결될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하루는 그 애가 기절놀이를 시킨 애 중 하나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은 반 전체에 주의를 주는 걸로 가볍게 지나갔다. ‘심한 장난은 삼가라’ 이 말뿐이었다. 사고를 쳐도 집에 돈이 많아 그럭저럭 무마되는 일이 잦았다. 그 애는 그렇게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리고 나도 그 애를 보며 그렇게 자랐다.

   하루는 그 애가 가방에 소주 한 병과 담배 두 갑을 숨겨 왔다. 1교시가 끝나고, 2교시가 시작되기 전 학년부장이 기습적으로 가방 검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잠깐 소란이 지나가는 사이, 짝꿍이 내게 3만원을 줄테니 가방을 바꿔달라 말했다. 나는 반장이고, 공부도 잘하니까 한 번쯤 걸려도 부장이 그냥 넘어가주지 않겠냐는 계산에서였다. 나는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모범생이었지만, 3만원이라는 금액 앞에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내가 낯설고 역겨웠다. 나는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원했지만 자존심을 구기기 싫어 거절했다. 그 애는 내 뒷통수를 세게 때리며 왜 사람 헷갈리게 고민하고 지랄이냐고 소리쳤다. 그 애는 나보다 더 가난한 다른 애와 가방을 바꿨고 가방을 바꿔준 그 아이는 3만원을 받은 죄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발바닥 10대를 맞았다. 돈을 받아도 받지 않아도 맞아야 할 처지라면 차라리 돈을 받는 쪽이 나았겠단 생각이 잠깐 스쳤다.

   내가 '가난'이라는 말로 나를 수식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용돈을 받진 못했지만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유행에 맞춰 옷을 살 순 없었지만 유행이 끝나기 전에는 엄마가 할부를 써서 비싸진 않지만 알만한 브랜드의 비슷한 옷을 한두 벌 사주었으니까. 실제로 그 시기는 우리 집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부유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짝꿍을 만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살 수 없는 사람,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초라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짝꿍이 체리향이 나는 립글로즈를 바르다 너 이런 거 써본 적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모욕을 주려는 그 애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애가 어제 산 걸 까먹고 또 샀다며 포장도 뜯지 않은 립글로즈를 내 책상 서랍에 넣었다. 너 쓰려면 써. 미련 하나 없는 말투였다.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립글로즈를 챙길지 말지 고민했다. 챙기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그냥 두고 가려니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포장만 뜯어 한 번만 발라 본 다음 두고 가자고 결심했다. 립글로즈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반짝였다. 입술이 도톰해보였고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돈'이라는 것이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다. 좋은 것. 좋은 느낌. 아름답고 투명한 것... 한 번 바르고 나니 유혹은 더 강해졌다. 나는 한참 그것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왔다. 잘 참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다음 날 아침, 내 자리 주변으로 짝꿍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짝꿍은 조소 띤 목소리로 반장 자존심 세더니 이건 그래도 갖고 싶었나봐? 라고 말했다. 당황한 나는 그거 내가 쓴 거 아니라고 거짓말했다. 짝꿍은 뭐든 다 아는 사람처럼 그렇겠지 라고 대꾸했다. 돈이 많다는 건 타인의 더러운 속내를 꿰뚫는 눈까지 갖게 되는 일인걸까. 나는 떨고 있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작고 초라한 주먹이었다.


무수의 이야기

   갑자기 아빠가 실직을 했던 중학생 시절, 우리집은 같은 동네에서 같은 동네로 이사를 했다. 더 작은 집으로. 부엌과 거실을 반으로 훨씬 작아졌고 방도 하나가 없었던 거 같다. 이전 집에서 쓰던 식탁을 부엌에 놓으니 지나가는 통로만 남고 꽉차게 되었다. 이사를 갔지만 같은 동네이기에 다니던 학교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내가 통학하던 길이 변하고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가야했다. 보통 동네 위치에 따라 중학교가 배정되기에 내가 이사간 곳은 그 근처 다른 중학교로 학생들이 다녔다. 그래서 마주보고 있던 정문과 후문 사이 우르르 아이들이 정문으로 들어갈때 나만 혼자 후문으로 걸어갔다. 학교를 갈때도 나갈때도 갈라지는 문. 정문 쪽엔 저층주공아파트, 고층주공아파트, 브랜드 아파트 등으로 다양했는데 후문 쪽엔 모두 고층주공아파트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아빠가 실직했다거나 집을 줄여서 이사했다는 걸 아무도 모를텐데 나는 왜인지 후문으로 지나다닐때마다 그 상황이 들킬 거 같다고 무의식으로 생각했던거 같아. 그때부터 난 새벽 등교를 했다. 난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난 교실 문을 가장 먼저 여는게 기분이 좋으니까, 사람들이 많지 않은 길이 좋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다시 정문 쪽 동네로 이사갈 때까지 약 1년을 그렇게 다녔다. 나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가난의 기억이었다. 


   그 시기 엄마와 저녁에 운동장 한바퀴를 돌며 엄마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했다.

“노력을 안했기에 가난한거야.”


   난 그 말에 불쑥 반항심이 들었다.

“그럼 우리도 노력을 안해서 그런거야? 아니잖아. 엄마, 아빠 모두 열심히 일했잖아. 근데 집이 작아졌잖아. 이건 뭐라고 말할거야.”


   이후 엄마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 남은 건, 엄마 스스로도 자신의 가난을 수치스러워하며 자책하고 있었다는 것. 그가 어떤 노력을 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전보다 작아진 집이라는 결과로 자신의 모든 걸 판단하고 있었다. 난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정말 노력하면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나? 정말 가난함은 노력하지 않음의 결과인가? 마음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난이 두려워 난 더 뛰어나고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새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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