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고전을 읽는 마음
부드럽게 퍼지는 빛으로 환한 실내, 빛이 드는 쪽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레이스를 뜨는 여자. 여자의 시선은 온통 손끝의 바늘과 실을 향하고 있다. 언제라도 그 자리에 머물 것 같은 침묵과 고요가 그녀와 함께 한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대기는 온전히 그만의 것일까. 이 조용하고 완강한 질서는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다.
베르메르의 소품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모든 서사와 이미지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벌어졌던 사건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역사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바쳐진 것처럼, 이 세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것처럼. ‘방 안에 여자들이 있다’는 것.
베르메르는 자신이 그리는 여성들의 일상이 그들에게 어떤 시간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침묵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시간이 정지하는 공간을 만들고, 그 정경을 화폭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이 그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 것처럼.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묘사하는 일’, 그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인지 모른다.
‘집 안의 천사’. 방 안의 여자들은 그렇게 불리웠다. 그들은 그저 ‘바느질 하는 여인’이었고, ‘속옷가지를 맡은 소녀’였으며,‘물을 기르는 하녀’였다. 그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를 달래고, 차를 따르고, 편지를 쓰고, 바느질을 하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세계에 은밀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오랜 습속이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그들에게서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말 없는 생각들이 만들어내는 신경증적인 진동은 피할 수 없었다.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우리가 놓친 것을 일깨운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 한쪽으로 밀쳐둔 광택이 도는 줄무늬 청색 쿠션, 아니 거기에 달린 빨간 술 장식. 그것은 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와 부드러운 천을 적시며 흥건히 고여 있는 피처럼 보인다는 것을.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그 피의 흐름을 감지했고, 그 흐름이 몰고 올 거대한 파도를 예견하며 그 스스로가 멈추지 않는 파도의 일부가 되었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18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대담하게 적고 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여성의 등장.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다른 어떤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여 있던 피는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고, 고요한 세계에 격렬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열정의 흐름이었고, 주체적인 관능의 질서였고, 또 다른 공간, 세계를 필요로 했다. 방 안의 여자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 흐름 속에 우린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를 만났다.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린 베넷양(<오만과 편견>)의 신랄한 독설과 한숨, 제인의 울부짖음과 비명(<제인 에어>), 한밤중 창문을 두드리는 캐서린(<폭풍의 언덕>)의 절규를 듣는다. 시인 앤 카슨은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라고 말했다. 베넷양의 한숨과 제인의 울부짖음, 캐서린의 절규는 여성 작가들의 삶이 투영된 깨진 유리 조각들인지 모른다. 그녀들은 누구였던가. 그들도 한때는‘방 안의 여자들’이었다. 18, 19세기 영국 젠트리(gentry, 하층 귀족 계급) 계급의 목사의 딸들, 부족한 가문의 자원과 장자상속제로 아버지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해야만 하는 옹색한 현실, 귀족 계급의 교양을 접하며 키워온 문화적 취향. 경제적 자원과 문화적 자원의 불일치를 극복하고자 했던 남다른 자의식.
그들은 무엇을 원했던가. 제인 오스틴은 가장 사소한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어 모든 것, 자신의 시대를 그려내고자 했다. 한가한 티타임의 소소한 대화, 무도회에서 서로 교차하는 남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그 시대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스틴은 응접실 구석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세계를 묘사했다. 그렇게 가문과 사회적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결혼, 구애와 혼사에서 드러나는 젠더화된 심리. 결혼을 통해서만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젠트리 여성의 불안과 자격지심이 일상의 세밀화로 그려졌다.
페미니즘의 고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저자들은 샬럿 브론테의 언어를 간명하게 요약한다. ‘나는 분노한다.’외롭고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가정교사 제인 에어의 삶은 이 세계의 몫이 없는 사람의 육성이기도 하다. 붉은 방에 갇힌 어린 제인의 울부짖음은 세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이들의 귓가에 여전히 메아리친다. 샬럿 브론테가 집요하게 탐구한 정동의 영역에서 우린 인간으로서 존엄의 근거를 새롭게 발견한다.
단 하나의 소설로 세계를 뒤흔든 에밀리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폭풍의 언덕>에는 가정교사도 없고, 고용주도 없다. 그저 무성한 히스와 황야의 바람, 거대한 무질서로 갈라진 세상이 있을 뿐이다. 에밀리를 이끈 충동은 (계급으로든, 정치적 견해로든, 사랑으로든) 갈라진 세상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고, 그것을 휘저어 세상을 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진앙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소설가라기보다 철학자나 물리학자에 가까운지 모른다.
앤 카슨은 에밀리 브론테의 시에 거듭 등장하는 ‘와처(watcher, 목격자)’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그리고 세계의 벌거벗은 핵심, 에밀리는 그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목격자는 에밀리 만이 아니었다.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 모두 자신들의 목격한 세계의 증인들이었다. 그것은 관계성과 정동의 세계였다. 자신들이 발견한 세계를 명명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였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문명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다시 귀기울여 본다.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서늘하고 축축한 피는 더이상 없는가. 또 다른 방 안의 여자는 없는가. 우리가 열어보지 않은 방은 없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웃음소리는 무엇일까. 제인 에어가 열고 싶지 않았던 손필드 저택 3층 다락방. 그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미친 웃음의 주인공 버사 메이슨.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 출신의 버사 메이슨, 그녀는 정말로 미친 여자일까. 그녀를 제인 에어의 억압된 자아,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18, 19세기 영국은 식민지 제국의 중심부였다. 인도 출신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감춰진 제국의 진실을 마주하라고 경고하며 닫혀있던 세계의 무수한 다락방을 열어젖혀 또 다른 방 안의 여자들을 만나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더이상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단지 우리를 새로운 여정으로 이끄는 이정표일 뿐이며, 그 여정을 위해 서로의 존재를 비춰줄, 우리가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비추고, 새로운 맥락에서 공명하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진 동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텍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우린 세 여성의 고전을 비춰줄 세 개의 거울로서 세 개의 텍스트를 선택한다. 지아 톨렌티노의 <트릭 미러>는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미디어가 조장하는 나르시시즘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밀레니얼 여성의 자아를 제목 그대로 생생하고 혼란스럽게 비춘다. 아시아계 여성인 작가 자신의 결혼에 대한 불안은 제인 오스틴이 말하지 못한 ‘에버 에프터’의 각주가 될지 모른다. 식민지 여성의 관점에서 <제인 에어>를 다시 쓴 진 리스(도미니카 출신의 크리올 작가)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광기로 몰고 간 제국과 가부장의 질서를 마주하게 한다. 시인 앤 카슨의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에밀리 브론테의 목소리를 뒤쫓는다. 어쩌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던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얼핏 마주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이제 잠시 세계로부터 눈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여 본다. 여전히 그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은 무엇일까. 어떤 믿음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한 우리들의 마음은 살아있고, 세계에 열려있다는 믿음,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 피가 흐르는 소리는 스스로 적어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확인한다. 바로 우리가 폭풍의 언덕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요크셔 변방의 작은 목사관에서 눈앞에서 펼쳐진 문명의 마지막 변경지대를 마주했던 브론테 자매처럼, 우리가 마주한 문명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 또 다른 인간적 본질을 해명할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하면서.
💟 이끔이 감상평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사람들이 다니는 응접실의 탁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고, 여행도 다니지 않았지만 그 탁자에서 세상을 향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죠. 오스틴이 머물렀던 응접실은 현재의 일상에서 보면 커뮤니티 게시판 같은 공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곳에서 오가는 일상의 문제와 배음처럼 깔린 당대의 풍속에 대해 오스틴은 주목했던 것이죠. 당대의 문제를 포착해내는 예리한 감각에서 칼럼니스트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릭 미러>의 작가 지아 톨렌티노와의 연결성은 이렇게 찾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미국 보수의 심장 텍사스에서 성장한 필리핀계 작가 톨렌티노는 그야말로 ‘트릭 미러’처럼 혼종과 균열로 점철된 미국 사회와 자신의 세대의 혼란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작가입니다. 욕망에는 욕망으로, 분노에는 분노로 맞서는 그녀의 글쓰기를 읽노라면, 뜨거우면서 차갑고, 혼탁하면서도 명징한 ‘현재’라는 감각을 들이키게 됩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변화된 위상과 그럼에도 여전한 여성이라는 존재의 불안을 마주하는 작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동시대 여성의 또다른 자화상을 만납니다.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제인 에어>를 두고 ‘어머니가 없는 여성이 맞닥뜨린 유혹’에 관한 이야기라고 인상적인 논평을 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설화에 가까운, “영혼을 만드는 골짜기”를 통과하는 여성의 순례기라는 것이죠. 제인 에어의 분노와 울부짖음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한 이유이자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는 현대 여성의 초상이 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인 에어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그녀의 초상에 하나의 외상으로 남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습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서문에서 안젤라 스미스는 진 리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진 리스는 많은 동시대인들에게 일종의 유령으로 보였다. ’ 영국의 식민지 도미니카 출신의 크리올 작가가 <제인 에어>에 대한 응답으로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자메이카 출신의 크리올 여성의 관점에서 소설을 쓴 것은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태생만큼이나 부침 많은 앙트와네트 코즈웨이의 삶을 통해 리스는 주변부로 밀려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 속에 식민지의 진실을 담아 <제인 에어>를 넘어선 ‘20세기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읽을수록 ‘열린 텍스트’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딕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로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많습니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서사의 힘은 어디에 나오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사라져도 운명의 비극을 품은 ‘폭풍의 언덕’이라는 신화적 공간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황량한 황야에서 쉬지 않고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 소리처럼.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은 현대의 언어로 고대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탐험가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형식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고 말했다죠. 그렇게 그녀가 찾아낸 형식을 통해 마치 인화지에 떠오른 심령사진의 이미지처럼 유령 같은 에밀리 브론테의 존재가 우리 눈 앞에 나타납니다. 유리 조각처럼 깨지기 쉽지만 빛나는 생명처럼, 언뜻.
💟 여성 고전을 읽는 마음
부드럽게 퍼지는 빛으로 환한 실내, 빛이 드는 쪽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레이스를 뜨는 여자. 여자의 시선은 온통 손끝의 바늘과 실을 향하고 있다. 언제라도 그 자리에 머물 것 같은 침묵과 고요가 그녀와 함께 한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대기는 온전히 그만의 것일까. 이 조용하고 완강한 질서는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다.
베르메르의 소품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모든 서사와 이미지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벌어졌던 사건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역사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바쳐진 것처럼, 이 세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것처럼. ‘방 안에 여자들이 있다’는 것.
베르메르는 자신이 그리는 여성들의 일상이 그들에게 어떤 시간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침묵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시간이 정지하는 공간을 만들고, 그 정경을 화폭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이 그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 것처럼.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묘사하는 일’, 그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인지 모른다.
‘집 안의 천사’. 방 안의 여자들은 그렇게 불리웠다. 그들은 그저 ‘바느질 하는 여인’이었고, ‘속옷가지를 맡은 소녀’였으며,‘물을 기르는 하녀’였다. 그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를 달래고, 차를 따르고, 편지를 쓰고, 바느질을 하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세계에 은밀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오랜 습속이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그들에게서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말 없는 생각들이 만들어내는 신경증적인 진동은 피할 수 없었다.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우리가 놓친 것을 일깨운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 한쪽으로 밀쳐둔 광택이 도는 줄무늬 청색 쿠션, 아니 거기에 달린 빨간 술 장식. 그것은 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와 부드러운 천을 적시며 흥건히 고여 있는 피처럼 보인다는 것을.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그 피의 흐름을 감지했고, 그 흐름이 몰고 올 거대한 파도를 예견하며 그 스스로가 멈추지 않는 파도의 일부가 되었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18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대담하게 적고 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여성의 등장.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다른 어떤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여 있던 피는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고, 고요한 세계에 격렬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열정의 흐름이었고, 주체적인 관능의 질서였고, 또 다른 공간, 세계를 필요로 했다. 방 안의 여자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 흐름 속에 우린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를 만났다.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린 베넷양(<오만과 편견>)의 신랄한 독설과 한숨, 제인의 울부짖음과 비명(<제인 에어>), 한밤중 창문을 두드리는 캐서린(<폭풍의 언덕>)의 절규를 듣는다. 시인 앤 카슨은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라고 말했다. 베넷양의 한숨과 제인의 울부짖음, 캐서린의 절규는 여성 작가들의 삶이 투영된 깨진 유리 조각들인지 모른다. 그녀들은 누구였던가. 그들도 한때는‘방 안의 여자들’이었다. 18, 19세기 영국 젠트리(gentry, 하층 귀족 계급) 계급의 목사의 딸들, 부족한 가문의 자원과 장자상속제로 아버지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해야만 하는 옹색한 현실, 귀족 계급의 교양을 접하며 키워온 문화적 취향. 경제적 자원과 문화적 자원의 불일치를 극복하고자 했던 남다른 자의식.
그들은 무엇을 원했던가. 제인 오스틴은 가장 사소한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어 모든 것, 자신의 시대를 그려내고자 했다. 한가한 티타임의 소소한 대화, 무도회에서 서로 교차하는 남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그 시대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스틴은 응접실 구석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세계를 묘사했다. 그렇게 가문과 사회적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결혼, 구애와 혼사에서 드러나는 젠더화된 심리. 결혼을 통해서만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젠트리 여성의 불안과 자격지심이 일상의 세밀화로 그려졌다.
페미니즘의 고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저자들은 샬럿 브론테의 언어를 간명하게 요약한다. ‘나는 분노한다.’외롭고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가정교사 제인 에어의 삶은 이 세계의 몫이 없는 사람의 육성이기도 하다. 붉은 방에 갇힌 어린 제인의 울부짖음은 세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이들의 귓가에 여전히 메아리친다. 샬럿 브론테가 집요하게 탐구한 정동의 영역에서 우린 인간으로서 존엄의 근거를 새롭게 발견한다.
단 하나의 소설로 세계를 뒤흔든 에밀리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폭풍의 언덕>에는 가정교사도 없고, 고용주도 없다. 그저 무성한 히스와 황야의 바람, 거대한 무질서로 갈라진 세상이 있을 뿐이다. 에밀리를 이끈 충동은 (계급으로든, 정치적 견해로든, 사랑으로든) 갈라진 세상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고, 그것을 휘저어 세상을 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진앙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소설가라기보다 철학자나 물리학자에 가까운지 모른다.
앤 카슨은 에밀리 브론테의 시에 거듭 등장하는 ‘와처(watcher, 목격자)’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그리고 세계의 벌거벗은 핵심, 에밀리는 그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목격자는 에밀리 만이 아니었다.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 모두 자신들의 목격한 세계의 증인들이었다. 그것은 관계성과 정동의 세계였다. 자신들이 발견한 세계를 명명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였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문명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다시 귀기울여 본다.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서늘하고 축축한 피는 더이상 없는가. 또 다른 방 안의 여자는 없는가. 우리가 열어보지 않은 방은 없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웃음소리는 무엇일까. 제인 에어가 열고 싶지 않았던 손필드 저택 3층 다락방. 그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미친 웃음의 주인공 버사 메이슨.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 출신의 버사 메이슨, 그녀는 정말로 미친 여자일까. 그녀를 제인 에어의 억압된 자아,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18, 19세기 영국은 식민지 제국의 중심부였다. 인도 출신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감춰진 제국의 진실을 마주하라고 경고하며 닫혀있던 세계의 무수한 다락방을 열어젖혀 또 다른 방 안의 여자들을 만나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더이상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단지 우리를 새로운 여정으로 이끄는 이정표일 뿐이며, 그 여정을 위해 서로의 존재를 비춰줄, 우리가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비추고, 새로운 맥락에서 공명하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진 동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텍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우린 세 여성의 고전을 비춰줄 세 개의 거울로서 세 개의 텍스트를 선택한다. 지아 톨렌티노의 <트릭 미러>는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미디어가 조장하는 나르시시즘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밀레니얼 여성의 자아를 제목 그대로 생생하고 혼란스럽게 비춘다. 아시아계 여성인 작가 자신의 결혼에 대한 불안은 제인 오스틴이 말하지 못한 ‘에버 에프터’의 각주가 될지 모른다. 식민지 여성의 관점에서 <제인 에어>를 다시 쓴 진 리스(도미니카 출신의 크리올 작가)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광기로 몰고 간 제국과 가부장의 질서를 마주하게 한다. 시인 앤 카슨의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에밀리 브론테의 목소리를 뒤쫓는다. 어쩌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던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얼핏 마주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이제 잠시 세계로부터 눈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여 본다. 여전히 그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은 무엇일까. 어떤 믿음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한 우리들의 마음은 살아있고, 세계에 열려있다는 믿음,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 피가 흐르는 소리는 스스로 적어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확인한다. 바로 우리가 폭풍의 언덕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요크셔 변방의 작은 목사관에서 눈앞에서 펼쳐진 문명의 마지막 변경지대를 마주했던 브론테 자매처럼, 우리가 마주한 문명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 또 다른 인간적 본질을 해명할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하면서.
💟 이끔이 감상평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사람들이 다니는 응접실의 탁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고, 여행도 다니지 않았지만 그 탁자에서 세상을 향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죠. 오스틴이 머물렀던 응접실은 현재의 일상에서 보면 커뮤니티 게시판 같은 공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곳에서 오가는 일상의 문제와 배음처럼 깔린 당대의 풍속에 대해 오스틴은 주목했던 것이죠. 당대의 문제를 포착해내는 예리한 감각에서 칼럼니스트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릭 미러>의 작가 지아 톨렌티노와의 연결성은 이렇게 찾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미국 보수의 심장 텍사스에서 성장한 필리핀계 작가 톨렌티노는 그야말로 ‘트릭 미러’처럼 혼종과 균열로 점철된 미국 사회와 자신의 세대의 혼란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작가입니다. 욕망에는 욕망으로, 분노에는 분노로 맞서는 그녀의 글쓰기를 읽노라면, 뜨거우면서 차갑고, 혼탁하면서도 명징한 ‘현재’라는 감각을 들이키게 됩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변화된 위상과 그럼에도 여전한 여성이라는 존재의 불안을 마주하는 작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동시대 여성의 또다른 자화상을 만납니다.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제인 에어>를 두고 ‘어머니가 없는 여성이 맞닥뜨린 유혹’에 관한 이야기라고 인상적인 논평을 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설화에 가까운, “영혼을 만드는 골짜기”를 통과하는 여성의 순례기라는 것이죠. 제인 에어의 분노와 울부짖음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한 이유이자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는 현대 여성의 초상이 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인 에어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그녀의 초상에 하나의 외상으로 남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습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서문에서 안젤라 스미스는 진 리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진 리스는 많은 동시대인들에게 일종의 유령으로 보였다. ’ 영국의 식민지 도미니카 출신의 크리올 작가가 <제인 에어>에 대한 응답으로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자메이카 출신의 크리올 여성의 관점에서 소설을 쓴 것은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태생만큼이나 부침 많은 앙트와네트 코즈웨이의 삶을 통해 리스는 주변부로 밀려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 속에 식민지의 진실을 담아 <제인 에어>를 넘어선 ‘20세기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읽을수록 ‘열린 텍스트’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딕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로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많습니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서사의 힘은 어디에 나오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사라져도 운명의 비극을 품은 ‘폭풍의 언덕’이라는 신화적 공간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황량한 황야에서 쉬지 않고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 소리처럼.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은 현대의 언어로 고대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탐험가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형식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다’고 말했다죠. 그렇게 그녀가 찾아낸 형식을 통해 마치 인화지에 떠오른 심령사진의 이미지처럼 유령 같은 에밀리 브론테의 존재가 우리 눈 앞에 나타납니다. 유리 조각처럼 깨지기 쉽지만 빛나는 생명처럼, 언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