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보약’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나만큼 피로해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는 건 낮의 시간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쉬운 축에 속하는 일 입니다. 다들 이렇게 사는거고, 그 생각만으로도 잠이 오지 않고, 밤은 어제보다 오늘 더 길게 느껴지고, 그러다 아, 해가 뜨는건가 싶습니다. 단잠이라는 보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대신 맥모닝을 먹는 걸로 계획이 수정 되기도 하는 거죠.
박은정의 <밤과 꿈의 뉘앙스>와 강혜빈의 <밤의 팔레트>를 읽으며 저는 밤의 시간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려 애썼습니다. 이 중 한 권은 천 장에 오래 전부터 붙어있던 빛을 거의 잃은 야광별 스티커 같았고, 또 다른 한 권은 자기 직전에 갑자기 침대 밑으로 떨어진 스마트폰을 계속 손으로만 더듬어서 찾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읽자마자 제게서 멀어져가듯한 ‘시’였지만, 큐레이션을 위한 ‘음악’의 힘을 빌려오니 이제서야 시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와 케이팝의 조합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궁금한 마음을 겨우 누르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도 즐겨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케이팝이 보약이라고 믿는 사람으로부터.
산책 X 오지은, 서영호 ‘울타리’
기나긴 밤을 겪는 날들이 이어질 때, 해볼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밤을 맞이하기 전에 가능한 많이 걸어보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서 침대에 머리만 대면 바로 잘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보기 위함이지요.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타원에 가까운」*)이 곧 “마음이 무섭다는 생각, 발등이 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책”(「산책」**)이 되기도 하지만요.
오지은서영호의 ‘울타리’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치고 오로지 한 사람만 들인다는 내용의 가사이지만, 씩씩하고, 규칙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듯한 산책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앨범 [작은 마음]에서 이 곡의 앞뒤로 있는 곡들(‘404’, ‘허전해져요’)은 여러분을 당장 힘 빼고 눕게 만들 수 있지만, ‘울타리’만은 걷고 싶게 만들 거예요.
*<밤의 팔레트> 수록작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밤 X So!YoON ‘zZ’City’
두 시집은 ‘밤’에 대해 이야기 하는 표제작을 가지고 있는만큼 다양하게 밤을 언급하고, 묘사합니다. “어디서도 실패하지 않을 고독은 나의 재능, 속수무책 하룻밤을 영혼 없이 구르는 동안에도 밤은 지나갈테니”(「술을 삼키는 목구멍의 기분으로」**)처럼 그럴듯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면서, “견딜 수 없는 색깔을 골라보자”(「밤의 팔레트」*)는 요청을 받은 것 처럼,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느라 한없이 그 자리에 고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So!YoON의 ‘zZ’City’는 제목부터 ‘모두가 잠든 도시’를 연상시키고 있는, 밤에 관한 시구들과 함께 들어야 하는 0순위 곡입니다. 그는 언젠가 서울의 밤거리를 혼자 거닐었던 기억을 토대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곡 후반부로 가면 황소윤의 보컬과 황소윤의 코러스가 돌림노래처럼 주고 받는 파트가 있는데 정말 황소윤이 혼자서 다 하는 노래입니다. 흐르면서, 동시에 고여있는 듯한 밤에는 이 곡을 무한히 반복해서 들어보세요.
*<밤의 팔레트> 수록작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꿈 X 백예린 ‘야간비행’
“9월의 유령들이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을 꿈속으로 밀어 넣으면 이불 밖으로 자꾸만 발이 나왔다” (「블라디의 끝」**)라는 구절을 올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많은 분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를 때에는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는 게 실제로 더 나을 때도 있고요. 자는동안 꿈의 기운을 빌어 해소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꿈 한 번 꾸지 않고 잤다는 것은 인식의 오류이고, 우리는 매일 꿈을 꿀 수 밖에 없어서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백예린의 ‘야간비행’은 꿈속으로 밀어넣었을 때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는 발과도 같은 노래입니다. 30초 가량 이어지는 잔잔한 전주는 잠에 빠져드는 모습 같고, “난 지금 어딘가로 야간비행 / 확실한 게 없어도 난 달려가”라는 가사는 꿈 속에서 나름의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한 사람의 모습 같아요.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by ㅎㅇ
ㅎㅇ
뉴스레터 ㅎ_ㅇ의 발행인이자 케이팝 비둘기. 한 달에 한 권, 들불이 선정한 책과 k-pop을 연결합니다.
curator’s comment:
‘잠이 보약’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나만큼 피로해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는 건 낮의 시간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쉬운 축에 속하는 일 입니다. 다들 이렇게 사는거고, 그 생각만으로도 잠이 오지 않고, 밤은 어제보다 오늘 더 길게 느껴지고, 그러다 아, 해가 뜨는건가 싶습니다. 단잠이라는 보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대신 맥모닝을 먹는 걸로 계획이 수정 되기도 하는 거죠.
박은정의 <밤과 꿈의 뉘앙스>와 강혜빈의 <밤의 팔레트>를 읽으며 저는 밤의 시간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려 애썼습니다. 이 중 한 권은 천 장에 오래 전부터 붙어있던 빛을 거의 잃은 야광별 스티커 같았고, 또 다른 한 권은 자기 직전에 갑자기 침대 밑으로 떨어진 스마트폰을 계속 손으로만 더듬어서 찾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읽자마자 제게서 멀어져가듯한 ‘시’였지만, 큐레이션을 위한 ‘음악’의 힘을 빌려오니 이제서야 시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와 케이팝의 조합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궁금한 마음을 겨우 누르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도 즐겨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케이팝이 보약이라고 믿는 사람으로부터.
기나긴 밤을 겪는 날들이 이어질 때, 해볼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밤을 맞이하기 전에 가능한 많이 걸어보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서 침대에 머리만 대면 바로 잘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보기 위함이지요.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타원에 가까운」*)이 곧 “마음이 무섭다는 생각, 발등이 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책”(「산책」**)이 되기도 하지만요.
오지은서영호의 ‘울타리’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치고 오로지 한 사람만 들인다는 내용의 가사이지만, 씩씩하고, 규칙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듯한 산책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앨범 [작은 마음]에서 이 곡의 앞뒤로 있는 곡들(‘404’, ‘허전해져요’)은 여러분을 당장 힘 빼고 눕게 만들 수 있지만, ‘울타리’만은 걷고 싶게 만들 거예요.
*<밤의 팔레트> 수록작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두 시집은 ‘밤’에 대해 이야기 하는 표제작을 가지고 있는만큼 다양하게 밤을 언급하고, 묘사합니다. “어디서도 실패하지 않을 고독은 나의 재능, 속수무책 하룻밤을 영혼 없이 구르는 동안에도 밤은 지나갈테니”(「술을 삼키는 목구멍의 기분으로」**)처럼 그럴듯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면서, “견딜 수 없는 색깔을 골라보자”(「밤의 팔레트」*)는 요청을 받은 것 처럼,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느라 한없이 그 자리에 고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So!YoON의 ‘zZ’City’는 제목부터 ‘모두가 잠든 도시’를 연상시키고 있는, 밤에 관한 시구들과 함께 들어야 하는 0순위 곡입니다. 그는 언젠가 서울의 밤거리를 혼자 거닐었던 기억을 토대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곡 후반부로 가면 황소윤의 보컬과 황소윤의 코러스가 돌림노래처럼 주고 받는 파트가 있는데 정말 황소윤이 혼자서 다 하는 노래입니다. 흐르면서, 동시에 고여있는 듯한 밤에는 이 곡을 무한히 반복해서 들어보세요.
*<밤의 팔레트> 수록작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9월의 유령들이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을 꿈속으로 밀어 넣으면 이불 밖으로 자꾸만 발이 나왔다” (「블라디의 끝」**)라는 구절을 올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많은 분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를 때에는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는 게 실제로 더 나을 때도 있고요. 자는동안 꿈의 기운을 빌어 해소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꿈 한 번 꾸지 않고 잤다는 것은 인식의 오류이고, 우리는 매일 꿈을 꿀 수 밖에 없어서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백예린의 ‘야간비행’은 꿈속으로 밀어넣었을 때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는 발과도 같은 노래입니다. 30초 가량 이어지는 잔잔한 전주는 잠에 빠져드는 모습 같고, “난 지금 어딘가로 야간비행 / 확실한 게 없어도 난 달려가”라는 가사는 꿈 속에서 나름의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한 사람의 모습 같아요.
**<밤과 꿈의 뉘앙스> 수록작
by ㅎㅇ
ㅎㅇ
뉴스레터 ㅎ_ㅇ의 발행인이자 케이팝 비둘기. 한 달에 한 권, 들불이 선정한 책과 k-pop을 연결합니다.